2017년 7월 11일 화요일

순욱처럼 죽을 것인가? 가후처럼 살아갈 것인가?

순욱

어느 날 순욱이 시름에 잠겨 있는데 문득 조조로부터 사자가 달려와 꾸러미 하나를 전했다. 풀어 보니 음식을 담는 그릇이었는데, 조조가 친필로 뚜껑을 봉한 것이었다.
순욱은 불길한 느낌을 누르며 봉함을 뜯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그릇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순욱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내 조조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대가 먹을 것은 없다. 내가 그대에게 보낼 것은 이 빈 그릇과 같은 옛정의 껍질뿐이다."
순욱의 귀에는 그 같은 조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먹을 것이 없다면 죽는 길뿐이지 않은가. 순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독을 꺼내 마셨다. 그때 그의 나이 쉰이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힌 것은 조조를 잘못 본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말라진다는 바닷물 같은 인간의 권력욕에 대한 자신의 무지였다.
- 이문열의 삼국지 7권 96p -
 순욱은 조조를 20년 넘게 도운 최측근이였다. 그는 하후돈이나 허저같은 장수도 아니고 곽가나 사마의 같은 책사도 아니었다. 그는 조조가 전투를 나갈 때마다 그의 근거지를 맘놓고 맡길 수 있었던 뛰어난 행정가였다. 또한 그는 청렴한 선비로 조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순욱이 처음 조조에게로 왔던 시기에는 조조의 세력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순욱은 조조보다 몇 배나 큰 세력인 원소의 요청을 거부하고 조조에게로 왔다. 순욱이 조조를 선택한 이유는 조조가 쓰러져가는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나서 최고의 세력으로 커진 조조가 한나라의 충신이 아니라 권력욕에 사로잡혀 끝임없이 권력을 탐하고 결국 황제의 자리마저 노리는 것을 보고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비판하다가 결국 조조의 미움을 사게된다.
조조는 순욱을 죽일 기회를 노리다가 오나라 정벌을 위해 출전하면서 순욱을 억지로 데려가고 전쟁터에서 순욱에게 텅 빈 그릇을 보내고, 결국 순욱은 자살하게 된다.


가후

가후는 삼국지 전편에 걸쳐서 골고루 나오는 인물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처음으로 삼국지에서 등장하는 것은 동탁의 사위로 등장을 한다. 그는 동탁의 사위이자 모사가로 동탁이 천자를 피박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을 때 그의 최 측근이었다.
그리고 동탁과 여포가 초선때문에 사이가 벌어졌을 때도 동탁을 달래서 초선을 여포에게 보내라고 설득하는 등 동탁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러다 결국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다시 이각과 곽사가 여포를 쫓아냈을 때는 이각과 곽사의 모사가로 활약하여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남아있게 된다.
그 이후 이각과 곽사의 또한 서로 싸우게 되고, 그 틈을 이용해 조조가 천자를 등에 업고 이각과 곽사를 소탕할 때는 용케도 몸을 빼내서 장수의 모사가가 된다.
가후가 장수의 모사가로 있을 때 조조가 장수의 땅을 침범하자 가후는 꾀를 내어 조조의 취기에 빠뜨리고, 결국 조조의 친위대장인 전위를 죽이고, 조조의 맏아들인 조앙마져 죽이는 성과를 거둔다. 또한 조조마져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치게 만든다.
그런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가후 였지만 나중에는 조조의 모사가 되어 조조를 위해서 일하게 되고, 나중에는 조조의 첫째아들인 조비의 스승까지 되어 조비를 태자로 만들어주는데 큰역할을 하게된다.
이렇게 항상 권력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았던 가후는 70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런 가후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조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말 세 마리가 나란히 한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었다. 너무 생생한 꿈이라 깨어난 뒤에도 조조는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가후를 불러 꿈얘기를 하며 물었다.
"지난날에도 말 세 마리가 한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나는 마등 삼부자가 화근이 되리라는 뜻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마등이 이미 죽었는데도 어젯밤 다시 말 세 마리가 한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꿈을 꾸었다. 이게 좋은 꿈인가? 나쁜 꿈인가?"
가후가 듣기 좋은 말로 둘러댔다.
"말을 먹이신 것이라니 좋은 징조올시다. 말들이 조씨에게로 돌아와 기름을 받는데 의심쩍으실 게 무어 있습니까?"
그러나 실인즉 그 말 세 마리는 사마의와 사마소, 사마사 삼부자를 뜻한 것이었다.
- 이문열의 삼국지 8권 224p -

가후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상 얘기를 돌려서 했다고 한다. 위의 얘기도 가후는 사마의 삼부자가 나중에 조조의 위나라에 큰 화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을 조조에게 굳이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자신이 잘모르고 있다는 듯이 조조에게 듣기 좋은 소리로 얘기한 것이다.
아마도 조조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권력이 사마의 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직감했을 수도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순욱과 가후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인물이다.
순욱은 원소를 뿌리치고 조조에게로 와서 조조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그에 반해 가후는 동탁, 이각과 곽사, 장수, 조조, 조비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흐름 속에 섞여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결국 순욱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가후는 7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누구의 삶이 옳았는지는 시대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지는 것 같다.
과거에는 순욱의 깨끗한 자살이 가후의 비굴한 장수보다 아름답다 했을 것이고,
최근에는 가후의 뛰어난 처세술이 순욱의 고지식함보다 높게 평가받고 있는 듯 하다.


영화 "관상"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송강호가 바닷가에서 파도를 바라보며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송강호는 자신의 파도만 보았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즉, 사람의 관상만 보았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관상으로는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왕이 되고, 평범한 관상을 가진 사람이 공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가후는 확실히 시대의 흐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순욱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무너진 한 왕조를 부활 시키려 하다가 죽었고, 가후는 시대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 그 흐름에 순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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